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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기타자료 ] 김원홍이 평양의 김재규일까?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04-22 조회수   3155

 


김원홍이 평양의 김재규일까?
김원홍이 實勢라는 이야기가 남한 언론에 자꾸 나면 김정은도 신경이 예민해질 것이다. 독재자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실력자' '실세' '2인자' 이다. 평양에 제2의 김재규가 있는가? 혹시 김원홍이 그런 인물일까? 김정은이 이 글을 읽으면 기분이 좋아질까?
趙甲濟
북한 정권의 제2인자는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이란 게 정부의 판단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그는 보위부장이지만 인민보안부 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고 정찰총국 업무도 일부 맡고 있다"고 설명하였다고 한다.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RFA)도 지난달 30일 "사업권을 놓고 권력기관간에 치열한 경합이 벌어진 북창화력발전소의 설비교체 업무를 김정은이 보위부에 넘겨줘 김 보위부장의 손을 들어줬다"고 보도했다.

국가안전보위부는 지금의 국정원보다는 박정희 정권 시절의 중앙정보부에 더 가깝다. 자연히 박정희 대통령을 弑害(시해)하였던 김재규 당시 정보부장과 김원홍을 비교하게 된다.

몇달 전 북한 전문가와 안보 전문가들이 모여 雜談(잡담)을 하면서 김정은의 운명을 전망하였다. 이야기를 오래 하다 보니 의견이 한 곳으로 모였다.

<김정은의 권력장악은 확고한 것으로 보인다. 이건 겉모양이고 권력층 내부는 복잡할 것이다. 집권 이후 측근들을 많이 죽이니 모두가 전전긍긍할 것이다. 그들 중에는 애국자도 있을 것이다. 특히 2인자가 가장 불안할 것이다. 이런 불안정 요소에 경제 악화, 소요 등 외부의 충격이 가해지면 북한판 10·26사건도 일어날 수 있다. 2인자에 의한 김정은 암살 같은 돌발 요인은 남아 있다. 아니,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다. 문제는 한국 측이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이다. 김정은 등 북한의 권력층 인사들은 남한 언론을 볼 수 있다. 남한 언론이 장성택을 김정은의 후견인처럼 부각시킨 것이 김정은을 자극, 張을 제거하는 하나의 심리적 동기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한국이 가진 돈, 정보, 언론 등을 이용하면 북한판 10·26 사건을 앞당길 수도 있다.>

김원홍이 實勢라는 이야기가 남한 언론에 자꾸 나면 김정은도 신경이 예민해질 것이다. 독재자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실력자' '실세' '2인자'이다.

김재규 정보부장이 아버지처럼 따르던 朴正熙 대통령을 弑害(시해)하기로 결심하는 과정에선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1. 대위 출신 차지철 경호실장이 朴 대통령의 威光(위광)을 업고 중장 출신 김 부장을 견제, 자존심이 강한 그를 자극하였다.
2. 경호실장과 정보부장의 갈등을 조정해야 할 김계원 비서실장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同鄕(동향)인 김재규를 감쌌다. 사건 당일 김재규가 '오늘 해치우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도 농담으로 넘겼다.
3.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싫증, 김영삼 의원 제명, 釜馬사태로 인한 民心이반 등이 김재규의 時局 판단에 영향을 끼쳤다.
4. 韓美관계의 악화로 박 대통령이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형국이었고, 미국 측의 동향에 민감한 김재규는 이를 의식하였다.
5. 부마사태의 수습책으로 김재규 정보부장을 교체할 것이란 정보가 나돌았다. 김재규도 자신이 擧事(거사)할 수 있는 시간대가 사라진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6. 우직하고 온순하지만 화를 내면 통제가 되지 않는 성격과, 肝(간)이 나빠 격무를 감당할 수 없었다는 점이 돌발행동의 한 요인이었다. 그는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가족들에게 한 유언중에서, '내가 肝이 나빠 자연사를 하더라도 7~8년밖에 못 살 것이다. 후세 사람들에게 죽음의 시기를 잘 선택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고 했다.
7. 무엇보다도 당일 궁정동 安家의 저녁 식사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차지철이 대통령 面前에서 정보부장을 몰아세우고 朴 대통령은 이를 말리지 않았다.

여러 요인들 중에 주목할 점은 건강 惡化와 교체설이다. 心身이 불안해진 것이다. 여기에 나름대로의 정의감이나 사명감이 보태졌다. 대통령 弑害 같은 결심은 절박한 심정이 아니면 할 수 없다.

김정은 주변에서도 김재규처럼 절박한 심정에 빠지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 독재체제에선 제2인자가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제1인자는 2인자가 잘해도, 못해도 다 불안하다. 2인자의 운명은, 쿠데타로 1인자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든지(수양대군), 逆謀로 몰려 제거되는 게(장성택) 보통이다. 예외는 三國統一의 元勳 金庾信(김유신)이다. 그는 수십년 간 兵權을 잡고, 선덕여왕,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등 네 왕을 모시면서 삼국통일을 이뤄냈다.

金庾信은 가야 王族 출신으로서 眞骨(진골), 聖骨(성골)이라야 왕이 될 수 있는 신라에선 절대로 정권을 잡을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타고 났다. 그의 여동생이 김춘추(태종무열왕)의 부인이 되고 김춘추의 딸이 김유신의 부인이 되었다. 아무 왕도 김유신이 역모를 꾸밀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1979년 12·12 사건도 全斗煥 국군보안사령관의 절박한 심정과 관련이 있다. 당시 실권자인 鄭昇和 계엄사령관은, 하나회와 정규육사출신 장교단의 보스 전두환 사령관을, 閑職(한직)으로 보내는 인사에 관하여 당시 국방장관 노재현과 합의한 상태였다. 이 정보가 전두환 그룹에 전해졌을 것이고, '시간이 없다'는 절박감이 정승화 장군 체포를 결심하는 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이끄는 전두환이라고 하더라도 합동수사본부장을 겸한 국군보안사령관이 아니었더라면 12·12 사건을 일으켜 집권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사람만큼 자리가 역사를 만든다.

1961년 5·16 군사혁명도 비슷하다. 朴正熙 소장은 軍內 개혁을 추진한 청년장교들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되어 곧 轉役(전역)당할 처지에 있었다. 그 또한 '혁명을 할 수 있는 시간대가 줄어든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1953년 3월 소련의 專制者 스탈린이 죽자 비밀경찰 두목인 베리아가 實權을 잡았다. 형식상으로는 수상인 말렌코프가 1인자였지만.
베리아는 스탈린의 명령으로 수십 만의 공산당원들을 숙청한 사람이었다. 흐루시초프, 불가닌, 몰로토프 등 다른 간부들은 베리아의 칼이 언제 자신들을 겨누게 될지 전전긍긍하였다. 이때 제1서기인 흐루시초프가 소련 공산당의 정치국원들을 규합한 뒤 군 고위층과 짜고 회의 도중 베리아를 체포, 처형하였다. 이 역시 '너를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는 절박감이 動機(동기)였다.

잔인한 처형을 되풀이하는 김정은 주변에 '저 자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좋은 일이나 해보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없다.

그러한 개인적인 동기 외에 외부의 사건이 내부 갈등을 촉진하여 사고를 내는 경우도 있다. 1989년 12월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체스쿠는 민중봉기에 직면, 보안군을 동원, 진압을 시도하다가 시민과 군대의 저항에 부딪쳤다. 그는 부인과 함께 헬리콥터로 도망가다가 붙들려 총살당하였다. 1989년 헝가리, 동독, 체코, 폴란드의 공산정권이 차례로 무너져 내리는 역사적 大轉換期에는 강경 진압책이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평양에 제2의 김재규가 있는가? 혹시 김원홍이 그런 인물일까? 김정은이 이 글을 읽으면 기분이 좋아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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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의 사형 직전 술회: '내가 肝이 나빠 자연사를 하더라도 7~8년밖에 못 살 것이다. 후세 사람들에게 죽음의 시기를 잘 선택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

대법원 전원 합의체가 10·26사건 피고인들에 대한 상고기각 판결을 내린 것은 1980년 5월 20일이었다. 梁炳晧(양병호) 대법원판사 등 6명은 주범 金載圭와 다른 피고인들에게 적용한 ‘내란 목적의 살인죄’는 성립되지 않고 ‘단순 살인죄’로 봄이 타당하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양병호는 “내란 목적의 살인이 되려면 상당히 넓은 범위의 모의와 조직, 다수에 의한 폭동 및 일정한 지역의 평온을 해치려는 계획 등이 있어야 하는데 이 사건은 김재규 혼자서 사전 모의 없이 그의 부하들을 지휘하여 저지른 범행이기 때문에 단순 살인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 사흘 뒤(23일)에 김재규는 남한산성의 軍교도소에서 오전에 40분, 오후에 45분간 두 차례 가족들과 마지막 면회를 했다. 교도소에서 면회 중의 대화를 녹음하여 기록해 놓은 자료가 있어 처형되기 하루 전 김재규의 심리상태를 짐작하게 한다. 오전에 면회 온 두 동서와 두 처남, 그리고 운전기사에게 김재규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내가 죽거든 동정복에 중장 계급장을 붙여 입관해 주고 검은 양말에 검은 구두를 신겨 주고 오른손에는 상아 지휘봉을 쥐어 주되 내 약력은 창호지에 적어 관 속에 넣어 다오.”

“내 예감에는 내가 물이 나는 곳에 묻힐 것 같은데…… 내 동지가 모두 일곱 사람이니 나를 중심으로 내 좌우에 두 대령과 경비원을 각각 두 명씩 묻어 다오. 내 옆에는 스페이스를 남겼다가 내 집사람이 죽으면 묻어라(注-김재규는 여섯 명의 사형수를 일곱 명으로 착각하고 있다).”

김재규는 자신에 대한 사형집행이 민주화 운동을 촉발시킬 것이라고 예언한다.

“내 시체는 집에 들이지 말고 병원에 안치시켰다가 장사를 지내라. 긴급조치 석방자, 복권자, 복학생들이 내 棺을 메고 시가행진을 할 우려가 있으니 절대로 못하게 하라. 나의 사형집행이 이루어지면 나에 대한 국민감정이 돌아서서 민주화 운동이 확 일어날 것이다. 내 죽음이 결정적인 모멘텀이 된다. 내가 肝이 나빠 자연사를 하더라도 7~8년밖에 못 살 것이다. 후세 사람들에게 죽음의 시기를 잘 선택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 소련이라는 나라는 세계의 지붕으로서 여기서 빨간 물이 계속해서 내려오니 민주화가 되든지 유신체제가 연장되든지 간에 적화만은 막아야 한다.”

'내가 肝이 나빠 자연사를 하더라도 7~8년밖에 못 살 것이다. 후세 사람들에게 죽음의 시기를 잘 선택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라는 말이 걸린다. 10·26 시해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기 전에 김재규 정보부장은 肝 질환을 앓고 있었다. 오후엔 한 시간 정도 꼭 낮잠을 잤다. 체력이 달려 서류도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국장급 보좌관에게 결재 서류 검토를 전담시키기도 하였다.

당시는 정치 상황이 급변하고 있을 때여서 정보부장이 한가하게 病을 관리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가중되는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가 10·26 사건의 한 요인이 되었다. 혹자는 간 질환으로 오래 살지 못하게 될 것을 안 그가 막가는 선택을 하였을 것이란 추리도 한다. 사형 집행되기 하루 전에 그가 남긴 말-'내가 肝이 나빠 자연사를 하더라도 7~8년밖에 못 살 것이다. 후세 사람들에게 죽음의 시기를 잘 선택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에 그런 암시가 들어 있다. 정치적 격변기에 당무자가 건강하지 못하면 국가적 變故(변고)가 생길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대통령 후보는 선관위에 등록할 때 의무적으로 건강진단서를 붙여야 할 것이다. 재산 공개보다 더 중요한 건 건강상태 공개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5000만 명이 탄 대한민국호의 機長으로 선출하는 건 일종의 자살행위가 될 수 있다.




[ 2016-04-10, 2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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